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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에서 만난 한옥과 패션의 만남, '슬로우유니버스'

by cjsend1024 2025. 7. 25.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로컬 의류 브랜드의 철학

전주에서 만난 한옥과 패션의 만남, '슬로우유니버스'
전주에서 만난 한옥과 패션의 만남, '슬로우유니버스'

전주 한옥마을 속에서 만난 아주 느린 우주


전주한옥마을은 매번 가도 새로운 풍경을 선사한다.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이곳 골목 어귀에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나를 멈춰 세운 공간이 있었다. 나무 대문 너머로 보이는 고요한 마당, 그리고 전통 기와지붕 아래 현대적인 감성이 흘러나오는 듯한 쇼룸. 그곳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로컬 패션 브랜드 ‘슬로우유니버스(Slow Universe)’였다.

‘슬로우유니버스’는 한옥 안에 자리한 의류 브랜드다. 패션 브랜드라고 하기엔 매장 분위기가 너무 조용하고, 감성적인 편집숍이라 하기엔 옷에 담긴 철학이 분명하다. 브랜드 이름 그대로 ‘느린 우주’, 그러니까 시간을 천천히 흘려보내며 만들어진 옷들이 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우리는 옷을 입고, 벗고, 다시 입는다. 그 반복 속에서도 쉽게 질리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지는 옷을 만들고 싶었다는 창립자의 메시지가 이 브랜드의 출발점이다.

그 철학은 공간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매장은 예스러운 전주 한옥 구조를 그대로 살리면서도, 조명과 진열 방식, 천의 배치까지 섬세하게 구성돼 있다. 시간의 결이 느껴지는 나무 바닥 위에 걸린 옷들은 마치 미술관의 작품처럼 조용히 이야기를 건넨다. 여기서 옷을 고른다는 건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하나의 감각을 느끼는 행위에 가깝다.

 

옷을 통해 전통을 재해석하는 방식


슬로우유니버스의 옷을 처음 보면 꽤 심플하다. 특별히 화려하지도 않고, 크게 튀는 디자인도 아니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또 입어보면 그 진가가 드러난다. 브랜드의 시그니처 디자인 중 하나인 ‘곡선 셔츠’는 전통 한복의 고름 라인에서 착안한 패턴으로 만들어졌으며, 와이드 팬츠는 옛날 선비의 바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특히 이 브랜드가 주목받는 이유는 전통을 과거의 유산으로만 소비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의 감성으로 풀어낸다는 점이다. 옷감은 대체로 천연소재 위주이며, 일부 라인에는 전주 지역의 염색 장인과 협업한 ‘자연염색 시리즈’도 포함된다. 브랜드는 단순히 “한국적인 옷”을 만드는 데서 멈추지 않고, “한국적인 삶의 리듬”을 반영한 옷을 지향한다.

2024년 봄 시즌 컬렉션의 테마는 ‘바람과 결’이었다. 바람이 한옥 처마를 스쳐가는 곡선, 전통 창살 사이로 스며드는 빛의 결, 그리고 그런 것들을 담은 옷의 주름. 너무 시적이냐고? 아니다. 이 브랜드는 실제로 옷을 시처럼 만든다. 옷 하나에 붙은 택(tag)에는 짧은 시구와 함께 옷의 이름과 영감이 쓰여 있다. 예를 들어, 회색 린넨 셔츠 하나엔 이런 문구가 있었다.

“한낮의 마당에서 기다리던 바람처럼, 너는 언제나 늦지 않게 온다.”

단순히 입는 옷이 아닌, ‘기억에 남는 옷’을 만들겠다는 철학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지역성과 지속 가능성을 담은 로컬 브랜드의 모범


슬로우유니버스는 자신들이 전주에 있는 이유를 명확히 한다. 단순히 임대료가 저렴해서가 아니다. 이들은 전주라는 도시에 깃든 시간성, 느린 리듬, 전통과 현재가 공존하는 정서가 브랜드 정체성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여기에서 시작했고, 앞으로도 계속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할 것이라 말한다.

의류 제작 방식도 대량 생산이 아닌, 소량 제작과 주문 생산을 원칙으로 한다. 패션 업계의 가장 큰 환경 문제 중 하나인 ‘과잉 생산’을 피하기 위해서다. 2~3벌 단위로 옷을 만들고, 품절된 옷은 대기 주문을 받아 다시 제작하는 방식. 이는 소비자에게 ‘빨리 사야 하는’ 압박보다, 기다림의 미학과 선택의 여유를 제안한다.

또한 매 시즌마다 전주 로컬 브랜드나 공방과 협업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한지 공방과 만든 한지 파우치, 도자기 작가와 제작한 향 받침대, 천연 향 브랜드와 협업한 룸 스프레이 등. 이들은 단순한 굿즈가 아니라, 브랜드가 추구하는 철학을 다른 장르로 확장한 결과물이다. 옷을 통해 시작된 느린 우주는 이제 공간, 향기, 물건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마치며: 우리는 어떤 속도로 살고 있나요?
슬로우유니버스를 나서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너무 빠르게 옷을 사고, 너무 쉽게 버린다. 옷장 안에는 ‘한두 번 입고 끝난 옷’이 수북하다. 그리고 그건 옷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 관계, 여행, 삶의 리듬까지도 다 그렇다.

슬로우유니버스가 말하는 ‘슬로우’는 단지 트렌드나 브랜드 포지셔닝이 아니다. 지금보다 조금만 더 천천히 살자는 삶의 태도였다. 옷 한 벌에도 이야기가 있고, 시간이 있고, 정성이 있다는 걸 기억하게 해주는 브랜드. 그런 브랜드가 로컬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참 반가웠다.

전주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혹은 시간이 조금 천천히 흐르는 공간이 필요하다면, 한옥마을 어느 골목에 숨어 있는 이 느린 우주를 만나보길 추천한다.
당신의 옷장에도 ‘시간이 쌓이는 옷’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