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기반 수제 맥주 브랜드가 생존하는 방식
광주 외곽에서 만난 맥주 공장, ‘트레비어’라는 이름
광주라는 도시에서 수제 맥주를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커피, 예술, 민주화 운동의 도시라는 이미지가 강해서일까. 하지만 그 광주 외곽, 첨단지구 한편에 한국 수제 맥주의 시작점 중 하나로 불리는 브루어리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름은 ‘트레비어(TREBIEA)’.
한때 맥주 애호가들 사이에서 ‘국내 수제 맥주의 자존심’이라 불렸던 그 브랜드를, 나는 직접 보고 맛보고 싶었다.
트레비어는 2003년 설립되었으며, 대한민국 수제 맥주 1세대 브랜드 중 하나다. 국내에 수제 맥주라는 개념이 거의 없던 시절, 독일 유학을 다녀온 창립자가 독일식 양조 방식과 장비를 국내에 도입하며 시작됐다.
광주라는 도시를 기반으로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서울보다 여유가 있고, 광주는 뿌리 깊은 장인정신이 살아 있는 도시입니다.”
창립자가 이렇게 말했듯, 트레비어는 양조 그 자체의 철학으로 무장한 브랜드였다.
외관은 전형적인 산업단지 건물 같지만, 내부로 들어서면 본격적인 맥주 생산 공간이 펼쳐진다. 유광 스테인리스 양조 탱크들이 늘어선 공간, 특유의 효모 냄새와 몰트 향, 그리고 작업 중인 직원들의 분주한 손길이 이곳이 ‘진짜 맥주가 태어나는 곳’이라는 걸 증명해준다.
방문자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은 없지만, 사전 예약 시 양조장 견학과 시음 체험이 가능하다. 나는 광주 지역 맥주 애호가 커뮤니티에서 우연히 이 정보를 접하고, 사전 연락 후 방문하게 되었다.
맥주의 맛보다 깊은 철학 – 트레비어가 고집하는 것들
트레비어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맥주 종류보다, 그 ‘고집’이었다.
이곳에서는 여전히 하이네켄식 라거나 페일 에일이 주류 시장을 장악한 시대에도 독일식 필스너, 바이젠, 둔켈 같은 전통 스타일 맥주를 고집하고 있다.
양조 기술자들은 대부분 10년 이상 트레비어에서 일한 이들로, 기술력만큼이나 철학이 단단했다.
“요즘 유행하는 NEIPA나 밀키 라거 같은 것들, 물론 매력 있죠.
하지만 우리는 맥주의 기본을 지키는 걸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한 양조사는 이렇게 말했다.
트레비어 맥주의 핵심은 ‘정직한 재료, 정직한 발효’다.
모든 맥주는 4가지 원재료만 사용한다: 물, 홉, 맥아, 효모. 여기에 인공 향료나 착향료는 일절 넣지 않는다. 이 원칙은 독일의 맥주순수령(Reinheitsgebot)에서 따온 것으로, 맛을 인위적으로 조절하기보다 시간과 온도로 맛을 다듬는 전통 양조 방식이다.
대표 맥주인 ‘트레비어 필스너’는 가벼운 탄산감과 깔끔한 피니시가 특징이고, ‘트레비어 바이젠’은 바나나와 정향향이 은은하게 감도는 밀맥주다. 특이한 건, 계절마다 소량으로 만드는 한정판 맥주가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여름엔 자몽 껍질을 살짝 첨가한 ‘자몽 바이젠’, 겨울엔 몰트를 진하게 볶아 만든 ‘초콜릿 스타우트’가 출시된다.
이런 철학 덕분에 트레비어는 국내 대형 프랜차이즈 맥주들과 비교해 단가 경쟁에서 뒤처질지라도, 품질로는 절대 밀리지 않는다는 자부심을 갖는다.
“우린 전통을 파는 브랜드입니다. 마시고 나면 기억에 남는, 그런 맥주를 만들고 싶어요.”
로컬에서 버티며 성장하는 방식 – 트레비어의 생존 전략
트레비어는 대기업 유통망 없이도 20년 넘게 생존해왔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핵심은 로컬 중심의 자생력이다.
광주 지역 내 20여 개 식당, 펍, 문화 공간과의 협업을 통해 지역 유통망을 확보했고, 최근에는 광주맥주축제, 양림동 문화행사 등에 ‘지역 맥주 스폰서’로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또 하나의 전략은 ‘체험형 브루펍’ 운영이다. 트레비어는 본사 옆에 위치한 직영 브루펍을 통해 방문객에게 직접 맥주를 설명하고, 맛보게 하는 공간을 운영 중이다. 이곳에서는 양조장 직배송 맥주를 가장 신선하게 즐길 수 있고, 맥주별 페어링 푸드도 제공된다. 메뉴는 단출하지만 맥주에 맞게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어 ‘맥덕(맥주 덕후)’들에게 특히 호평을 받는다.
코로나 이후, 트레비어는 온라인 유통에도 진출했다. 하지만 여전히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직접 양조장에서 소량 생산 후, 지역 내 공급망으로 배급하는 방식이다. 효율보다 품질을, 확장보다 지속을 택한 전략이다.
또한 이 브랜드는 젊은 소비자와의 접점을 늘리기 위해 크래프트 맥주 클래스, 홈브루잉 워크숍, 지역 대학과 연계한 맥주 연구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다. 전통만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로컬 안에서 ‘새로운 문화’를 만든다는 태도가 돋보인다.
마치며: 맥주 한 잔에 담긴 지역의 정체성
트레비어의 맥주를 마시며 생각했다. 이 맥주는 단순히 시원하고 맛있는 맥주가 아니다. 그것은 광주라는 도시의 성실함, 느릿함, 장인정신을 닮아 있다.
한 모금에 느껴지는 몰트의 구수함, 홉의 쌉싸래한 여운, 그리고 그 너머에 담긴 시간과 노력. 트레비어는 분명 하나의 로컬 브랜드지만, 그 존재감은 어떤 글로벌 맥주보다 묵직했다.
수제 맥주 시장이 점점 커지고, 다양한 브랜드가 등장하고 사라지는 지금, 트레비어처럼 한 자리를 오래 지켜온 브랜드의 무게감은 남다르다.
더 많은 사람이 이 브랜드를 알고, 찾아가고, 마셔보면 좋겠다. 그리고 각 지역마다 이런 ‘진짜 로컬 맥주’가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다음 광주 여행 때, 꼭 한 번 트레비어를 찾아보길.
맥주 한 잔에 담긴 도시의 향과 철학을 오롯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