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안에서 시작한 아날로그 디자인 브랜드 이야기
전통시장 골목에서 피어난 감성 공간
부산의 대표적인 전통시장 중 하나인 부전시장 한복판. 생선 비린내와 야채 상자들이 가득한 골목을 걷다 보면,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감성적인 쇼룸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아기자기한 문구들, 엽서, 손글씨 패브릭과 감성 일러스트 소품들. 바로 그곳이 ‘홍리단길 스튜디오’다.
‘홍리단길’이라는 이름은 부산의 감성 거리로 뜨고 있는 ‘홍대 + 해운대 + 경리단길’의 뉘앙스를 지역적으로 재해석한 조어처럼 들리지만, 사실 실제 홍씨 성을 가진 디자이너 자매가 이 브랜드를 창업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이들은 원래 서울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던 중, 고향인 부산으로 돌아와 전통시장이라는 공간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스튜디오는 시장통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지만, 내부는 전혀 다른 시간대에 머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손글씨로 쓰인 문구가 인쇄된 엽서, 수작업으로 만든 종이 스탬프, 바느질이 느껴지는 패브릭 소품, 그리고 무엇보다 ‘느림’을 전면에 내세운 공간 구조.
매장 뒤편에는 누구나 편히 앉아 쉴 수 있는 작은 작업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이곳은 종종 시민 대상 캘리그래피 클래스나 엽서 그리기 워크숍 장소로도 활용된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를 꿈꾸다
홍리단길 스튜디오는 디지털 속도를 따라가지 않는다.
그들이 주력하는 제품은 손글씨 문구와 아날로그 디자인 문구류, 패브릭 엽서, 일기장 등이다.
이 브랜드가 특별한 이유는 바로 ‘손의 흔적’이 제품마다 다르다는 점이다.
핸드메이드 도장을 하나하나 조각하거나, 페브릭 태그에 직접 실을 바느질해 넣는 일은 번거롭지만, 소비자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물건’이라는 특별함을 안겨준다.
실제로 이곳의 단골 고객 중에는 시장 상인들도 많다. 평소에는 장사에 치여 바쁘지만, 명절 즈음이나 손님에게 선물할 때 이곳에서 직접 만든 카드와 봉투 세트를 사간다고 한다.
홍리단길 스튜디오가 처음 주목받은 건 SNS가 아니라 시장 입소문이었다.
“이 골목에 귀엽고 예쁜 문구점 생겼다더라”,
“가보면 향기도 좋고, 주인들도 참 친절하더라”,
이런 말들이 오가면서 근처 상인들과 주민들이 먼저 찾기 시작했고, 이후 블로거들과 여행자들이 SNS에 사진을 올리면서 본격적인 브랜드 인지도를 얻었다.
이들은 모든 디자인에 지역의 언어와 감성을 담는다.
예를 들어, 부산 사투리를 활용한 레터링 엽서 시리즈는 ‘가’와 ‘가이소’의 뉘앙스 차이에서 오는 감정을 정성스럽게 시각화한다.
또한, ‘시장풍경 컬렉션’에서는 실제 부전시장 풍경을 배경으로 일러스트를 그려 넣기도 했다.
로컬에서 브랜드로 – ‘우리만의 속도’로 성장하는 법
홍리단길 스튜디오는 마케팅과 브랜딩도 특이하다.
이들은 전시보다는 로컬 팝업 스토어, 시장 공예축제, 독립출판 페어를 중심으로 브랜드를 알리고 있다.
매년 연말이면 ‘올해의 엽서’를 뽑는 시민 참여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이 프로젝트는 단골 고객들이 직접 1년 간의 감정을 글로 적어 엽서로 보내고, 그중 몇 개가 제품으로 제작되는 형식이다.
또한, 최근에는 ‘시장 속 디자인 클래스’라는 이름으로 지역 주민을 위한 소규모 워크숍을 운영하고 있다.
수익보다 중요한 건 ‘디자인을 매개로 한 연결’이라는 철학 때문이다.
이들의 행보는 단순한 감성 브랜드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전통시장이라는 오래된 공간 속에 새로운 감성을 심어낸 것,
그리고 그 감성을 통해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경험을 디자인한 것,
그게 바로 홍리단길 스튜디오가 ‘로컬’에서 시작해 ‘브랜드’가 되어가는 방식이다.
마무리: 진짜 ‘로컬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홍리단길 스튜디오는 전통시장의 소란 속에서 조용히 ‘자기만의 리듬’을 지키고 있는 브랜드다.
유행보다는 진정성, 확장보다는 밀도를 추구하며 천천히 자신들의 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그 길 위에, 작은 손글씨 하나가 남긴 온기가 쌓이고 있다.
디자인은 꼭 도시의 고층 빌딩 안에서만 태어나는 게 아니다.
시장통 골목 한복판에서도, 따뜻하고 감성적인 브랜드가 충분히 자랄 수 있다.
‘홍리단길 스튜디오’는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훌륭한 증거다.